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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나날들의 향기

2021년 이전의 회고록 - 2017년

by anothel 2021. 6. 27.

2017년 4월부터 지금까지 쭈-욱 이어온 개발자로서의 삶을 반추하고, 무려 4년씩이나 방치되어있던 기억들을 이제야 정리하려고 한다.

 

2021년에 반추하는 2017년


너 금방 이직할꺼지? 안돼 돌아가

 

1. 처음 마셔보는 고배(feat. 넌 분명 금방 이직할 거야. 안돼, 돌아가)


전역 후 1년 휴학을 했던 나는, 남들보다 1년 늦은 졸업 때문에 인생이 뒤처진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면 1년 정도 뒤처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 당시엔 뭐가 그렇게 조급했는지 모르겠다.(그렇다고 해서 열공을 한 것 또한 아니었다 ^_^)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 취업은 해야겠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정부에서 주최한 대학생 대상으로 보안 어쩌고 하는 아카데미를 한 달 동안 수강했다.(후회한다. 랩실에서 책이나 한 자 더 볼걸) 기초적인 컴퓨터공학 관련 수업과 자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이력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면접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등등 컴퓨터 공학과 학생들 취업시키기 위한 느낌의 아카데미였다. 해당 아카데미를 수강하면 대전 내 다양한 (SI) 기업에 바로 입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면접은 어떻게 보는지, 복장은 어떻게 갖춰야 하는지 등 컨설팅을 받은 후 한 회사에 면접을 봤다. 하지만 결과는 뚜-둔. 탈락! 그 회사 이사님께서 'XXX 님의 경험 및 스펙을 봤을 때 우리 회사에 입사를 해도 금방 퇴사를 하고 이직할 것 같다'는 내용의 정성이 담긴 탈락 사유를 담은 메일을 보내주셨다.(이사님의 탁월한 통찰력에 놀라울 뿐입니다.) 이렇게 패배의 쓴 맛을 인생에서 처음 느꼈다.

 

그래도, 개발자가 되고 싶어요

 

나의 스펙을 칭찬해주신 부분에 감사했고, 억울했다. 당시 난 이렇다 할 개발 경험이 없었으며, 교수님께서 'XX 너는 뭘 시작하기만 하고, 끝을 못 본다'라고 핀잔을 주실 정도였기 때문이다.

 

2. 첫 회사, 인생의 암흑기(feat. 형법 제283조, 개인정보보호법 제70조)


누군가 나에게 인생에 있어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후회되는 기억을 묻는다면, 이 회사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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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모든 학점을 따 놓은 당시의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취업을 준비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었다. 그런데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에 준비된 것 없이 성급한 취업을 해버렸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취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준비될 필요가 없는 회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말 그대로 좋소)

이 회사에 근무하며 내가 많이 망가진 것 같다. 3개월 동안 지방에 출장을 가서, 혼자 근무했다. 늘 혼자였고, 사무실에 출근해도 아무도 없었다. 하루 동안 아무랑도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기도 했다. 나름 매뉴얼 만든답시고 영어로 매뉴얼도 만들고, 회사에서 원하는 스크립트 언어의 제어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지만, 대체 그 3개월 동안 뭘 했는지 왜 했는지 모르겠다. 이후에도 5개월 정도 근무를 하며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할 말이 정말 많지만, 그냥 접어두려고 한다.

이 회사를 탈출한 건 정말 정말 하늘이 나를 도왔다고 생각한다.(참고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직 후 이 회사에서 회식에 와달라고 하도 요청을 하시기에, 참석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꺼냈다. 수시로 전화해서 너의 주민등록번호도 다 알고 너의 정보를 다 알고 있으니, 어느 회사로 갔는지 알아내서 해코지할 거라고 예고하시며 화내고 폭언하며 협박하시는데, 저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고 얘기할 곳도 많다고. 그 후로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XXXXX연구원에 근무하는 XXX 박사.(검색해보니 한자리하시는 거 같다.) 잘 지내시죠? 헌법에 직업 선택의 자유라는 게 나와 있는 거 같던데, (XX공대에서 박사학위 후 20년간 한국, 일본, 독일, 스위스, 미국에 있는 여러 국립가속기연구소와 대학교에서 차세대 가속기 설계/개발/운영 그리고 가속기 분야 인재양성을 해오고 계신) 똑똑한 박사님인 만큼 많이 아시리라 믿어요. 그리고 당시에 전화로 폭언 및 협박을 하셔서 제가 많이 힘들었는데, 멈춰주신 건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지내시길 바랄게요.(저도 잘 지낼 테니 지켜봐 주세요 ^_^)

 

3. (새로운) 첫 회사(feat. 열심히 해서 잘하는 신입사원이 되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첫 회사에 입사를 했다.

면접 당시 면접관님의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랩실에 같이 있던 형이 XX에서 복지가 가장 좋고 일하기 좋은 회사라고 추천해줘서 지원했다고 대답했다. 그동안 해왔던 프로젝트나 기술에 대한 질문에는 역시 대답할 게 없었다. 왜냐하면 학부생 당시 C#으로 만든 SC방식의 포커게임 역시 마무리를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당시의 나를 되돌아보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결국, 합격 메일도 탈락 메일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회사에 메일을 한 통 보냈다.

 

스물 여섯. 어렸고 간절했던 그 때

 

결국, 차주에 2차 면접을 진행했다.

당시 면접은 기술적인 질문보다는 인성적인 질문이 대다수를 이뤘다. 어쩌다 영어공부를 하게 되었고, 미국 교환학생과 해외 인턴쉽을 다녀왔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다. 휴학 당시 나는 버거킹 알바를 9개월 정도 했는데 외국인 손님이 비교적 많았고, 그들이 방문할 때마다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주문을 받았다. 그렇게 먼저 다가가 친해진 외국인이 많았고, 바다 건너 넘어온 사람들과 우리말이 아닌 또 다른 말로 소통하는 게 너무나도 신기했다. 그래서 회화학원을 다니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복학 후에도 토익캠프는 꼬박꼬박 챙겼다. 결국 학교에서 보내주는 교환학생, 해외인턴십을 다녀왔다.(물론 공짜로 ^_^)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준 버거킹, 사랑해요 (맥도날드 OUT!!!)

 

면접 마지막에 사장님께서 '그래서 미국 버거킹에서는 어떻게 인사를 하던가?' 이런 질문을 주셨다. 그래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Welcom to Bergerking, May I take your order?') 그렇게 입사를 하고 나중에 회식자리에서 팀장님께서 얘기해주셨다. 원래 1차 면접을 붙지 못했었는데, 회사에 메일을 보냈길래, 그래 너 한번 열심히 해봐라 하는 마음에 붙여주셨다고..(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4. 회사생활 Part.1(feat. 다른 팀에서 들으면 좀 놀랄 거 같네)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일을 잘 할리가 없었다. 생소한 C#, 거의 마무리 단계의 프로젝트 등. 열심히 했지만 '이걸 2주나 됐는데도 못했다고? 다른 팀이 들으면 놀래.' 하시는 핀잔을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하는 게 다가 아니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잘할 때까지 노력했다.(거의 매일 내가 불 끄고 퇴근을 했다.) 한 번은 야근하다가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핸드폰과 사원증을 사무실에 놓고 나와서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간은 금요일 늦은 9시 이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대로 퇴근한다면 월요일까지 불이 켜지 있지 않겠는가?

무작정 뛰었다.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컴퓨터가 있을만한 곳으로. 근처 소방서에 가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회사 그룹웨어에 로그인 후 메일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쌓인 메일이 얼마 없었고, 몇 안 되는 메일에는 연락처가 적혀있지 않았다. 간신히, 하나 찾은 다른 팀 과장님의 연락처로 (심지어 핸드폰도 없었어서 소방서 전화기로) 전화를 하여 사정을 말씀드렸다. 아주 감사하게도, 그분께서는 이제 집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하셨고, 다시 회사에 오셔서 쿨하게 사무실 문을 오픈해주신 후 집에 가셨다.(정말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렇게 그날 나는 밤 12시에 퇴근했다.

 

5. 회사생활 Part.2(feat. 개발자로서의 초석을 다지다.)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이동이 있었다. 이 이동은 나에게 새로운 개발자의 길을 열어주었다. 왜냐하면 이 전 팀에서는 C# 및 신기술을 주로 사용했던 반면, 새로운 팀에서는 C/C++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신기술이고 구기술이고 무엇이 중요하랴, 내가 하기에 따라 달렸음을)

차세대 전차에 들어가는 운용통제 컴퓨터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Motiff기반의 기존 1,2차 사업에서 양산된 시제를 Qt기반의 3차 시제로 마이그레이션 하고, 새로이 추가되는 기능들을 두 개의 버전에 적용하는 내용의 사업이었다.

 

  • C/C++
  • VxWorks
  • Motiff, Qt

 

한정된 자원의 특징을 갖고 있는 임베디드 기반에서 개발을 하다 보니 조금은 (아니 많이) 생소했다. 처음엔 정말 하나도 몰랐다. 왜냐하면, 크로스 플랫폼 빌드 후 이미 양상 된 양산시제에 업로드 후 테스트를 할 수 있는데, 그 시제가 한대 있었다. 코드 수정 후 코드를 보내서 빌드를 요청하고, 동료 자리에 가서 테스트해 볼 수 있었다. Visual Studio를 텍스트 에디트처럼 사용하여 개발했고, 제한적인 인텔리전스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당최 일을 열심히 하고 싶어도 환경이 안 따라주는 상황이다.) Motiff? 이전 회사에서 공부하며 알고 있었던 내용이긴 했지만, 전차에 들어가는 내비게이션을 제작할 정도의 수준으로 다뤄본 게 아니라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모르면 더 찾아보고 그래도 모르면 직접 가서 물어보고. 정말 많이 배웠다. 네트워크 통신, 프레임워크부터 쌩 C가 아닌 C++에서 사용할 수 있는 OOP개념까지.(당시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팀원분들 및 팀장님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정말 많이 감사합니다.)

 

6. 비트코인, 서울 Dream 그리고 대기업(feat. 남산의 야경)


2017년 말에 비트코인 대란이 일어났다. 무엇도 아닌 가상화폐라는 게 하나에 2700만 원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개발자로서 비트코인 대란에 빠질 수가 없었다. 눈이 빠지도록 차트를 보기도 했고, 돈을 벌기도 잃기도 했고, '대체 이게 뭐길래 이렇게 난리야?' 하면서 깃허브에서 비트코인 코드를 내려받아 분석도 했다.(물론 자세한 분석 시도를 해봤으나, 그 당시엔 실력이 많이 부족했었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_^; 조만간 시간 내서 비트코인 코드 분석하는 글을 올려봐야겠다)

10월 말 즈음엔 혼자 제주여행을 하며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대체 서울이 뭐길래 다 서울 사람들인 걸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고,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휴가를 내고 서울에 동거하고 있는 친구네 집에 방문하여 서울여행을 좀 했다.

친구 집을 기점으로 고궁 투어, 이태원, 홍대, 종로 등등 서울 방방 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땐 잘 몰랐지만, 지금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남산에서 남자 둘이서 가위 바위 보 하면서 계단 오르기를 하고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이상한 사람들이거나, 촌놈이거나.

 

남산에서 바라본, 너무나도 찬란하고 강렬했던 그 서울의 야경

 

이 서울 투어를 기점으로 나는 서울 Dream을 꿈꾸기 시작했다. 서울 아니면 (개발자 천지라고 친구에게 전해 들은) 판교로 이직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물론 이직하는 김에 대기업으로 이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당시 너무나도 난리였던 암호화폐 관련 직무이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7. 마무리


공부를 해보겠다며, 리눅스마스터 책을 샀고, 이 전부터 시도해왔던 정보처리기사, 컴활 1급, 한국사 공부, 어문회 1급 등은 하나도 하질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당시의 나는 이직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많이 성급하지 않았나 싶다. 그 회사에서 탑을 찍을 정도가 아니라면 이직은 조금 미뤄보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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