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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나날들의 향기

2021년 이전의 회고록 - 2019년 상반기

by anothel 2021. 6. 29.

2017년 4월부터 지금까지 쭈-욱 이어온 개발자로서의 삶을 반추하고, 무려 4년씩이나 방치되어있던 기억들을 이제야 정리하려고 한다.

 

2021년에 반추하는 2019년 상반기


동작이 안돼? 응, 그럼 주석 쳐 ^_^

 

1-1. 패잔병의 쓸쓸한 퇴장(feat. 다시는 자만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모든 이직 전쟁에서 패했었고, 원하던 것(앞자리 바꾸기, 서울이나 판교로 가기, 재밌는 개발 하기 등) 중 몇 개를 쟁취하지 못했다. 첫 번째 직장은 국방 SI업체라서 대부분의 프로젝트(사실 난 단 하나의 프로젝트를 맡았다.)AXX, NXX1, HHXXX 등에서 발주한 프로젝트였다. 당시의 나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낡은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구버전, 레거시, 차기, 고도화 등등 이름만 들어서 어마 무시한 고생이 눈앞에 떠오르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 혼자만 잘난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도 더 많이 잘 알 텐데 말이다.(또 나의 오만방자함이라고 생각한다.)

레거시 프레임워크일수록 아직까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안정성이 보장되어있다. 둘째로, 굳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까지 해오던 게 잘 되는데 굳이 새로운 것을 도입 또 공부하느라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셋째로 윗사람들의 인식이 위 두 개의 이유로 가득 차 있다. 이걸 나 혼자서 바꿔낼 수는 없다.(보통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더라.)

나는 안정성만을 추구하는 국방의 세계가 싫어서 핫했던 블록체인의 세계로 떠밀리는 쓸쓸한 패잔병이 되었다. 판교로 입성 후 집 문제로 인해 고시원에 7개월간 살았지만, 첫 시작은 할만했다. 이 정도라면 계속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엔 했다. 출장 왔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적어도 첫 시작은 할만했다.

 

1-2. 이때 좀 사놓을 걸(feat. 사채라도 써야만 했어)


1 bitcoin = 6,290,000 KRW 일 때가 있었지,

 

두 번째 회사에 들어가서 비트코인 가격이 얼마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그만 더듬어본다.) 기본 도메인 블록체인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다. 영어 문서를 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던 나는 블록체인과 1세대 암호화폐, 2세대 암호화폐 등등 다양한 지식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 심지어 공부한 걸 발표하기 위한 자료도 영어로 만들었다.(발표 당시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해서 늪에 빠졌던 건 우리끼리의 비밀~) 다양한 지식을 습득 후 주로 이더리움을 분석했다.

사실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지나가던 멍멍이가 물어 가버려서 존재하지 않는) X세대 블록체인 코어 기술?을 보유한 X코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출시 전에 구매(사기)(당)했던 상태였고, 실제 거래소에 상장이 되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이 코인으로 뭘 하네 뭘 하네 프로젝트를 벌렸다.(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해당 코인은 비트코인 코드 살짝, Dash 코드 살짝 잘 섞어서 만든 짬뽕이었다.

회사의 코인(돈에 눈이 먼 어른들의 피땀 눈물)으로 회식도 많이 했고, 다른 새로운 프로젝트를 벌였다. 무려 영화산업 플랫폼! 나름 영화 산업이라고, 회사의 여러 관계자들은 많은 돈을 들이고 LA에 영화제에까지 참석하기도 했다.(아마 이때 회사의 돈이 많이 줄지 않았을까 싶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나는 이더리움을 분석했다. Golang? 전혀 몰랐다. 그래도 한다. 왜냐하면 C++을 할 줄 안다면 Golang을 다루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서에서 개발자들은 C/C++, JAVA, Python을 섞어서 만들어낸 언어라고 서술했고, 개발하면서 Python의 특징인 스크립트의 개발, JAVA 형식의 쉬운 문법 그리고 C++처럼 컴파일 빌드 등의 특징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Golang을 사용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장하면서 자동으로 lint를 해주는 기능이다. 아마 이때부터 lint에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 go-ethereum을 분석하면서, 몇 번의 pull request 후 merge 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이때 거의 lint부분 혹은 사용하지 않는 코드나 주석을 제거했던 부분이었다.(물론, 나도 더 큰 부분을 수정해보고 싶었지만, 해당 코드는 너무 방대했고 나에겐 너무 완벽했어서 수정할 부분이 통 보이질 않았었다.)

Dash도 분석했다. 이건 C++ 기반의 코드인데, spork라는 기능이 있어서 비교적 쉬운 버전 update를 제공했다. 블록체인의 특성상 쌓인 블록을 되돌릴 수 없고, 버전은 upgrade 해야겠고, 그러는 순간에도 블록은 계속 쌓이고 있고. 그래서 spork라는 기능이 필요했다. 첫 번째 회사에서 코 피터 지도록 C/C++ 만 해왔던 나는 블록체인도 어느 정도 이해했겠다 새로운 코인을 분석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Dash 코인의 코드에서 spork 기능을 분석한 후 go-ethereum에 적용하는 것이 나의 미션이었고, 당시 팀장님께서는 내가 예정보다 5주 정도 빨리 마쳤다고 하셨다.(절대로 자랑은 아니다.) 사실 분석을 하고 적용하는 건 내가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쉽게 느껴졌었는데, 쉬워진 김에 비트코인도 분석을 했었다.(분석과 이해는 참 쉬운데 나는 왜 pull request 허락을 못 받는 것인가.) 아마도, 이 당시에 로그를 남겨서 추적하고 디버깅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2. 영어 스터디(feat. How was your last week)


판교에 와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영어회화 스터디에 가입을 했는데, 모 공부 모임 찾기 플랫폼을 통해 모인 8명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고, 나를 제외하고 대부분 영어를 너무 잘했다. 처음엔 스터디룸에 일주일에 두 시간씩 두 번 모여 수업을 진행했다. 영어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사실 모임에서 나는 (조금 재밌지만) 이상한 캐릭터였던 것 같다. 나는 집이 두채(해결안 된 전셋집 그리고 고시원)였고 부자 아닌 부자였으며 개발자라는 이류로 인텔리 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 같다.

 

과연 그럴까,

 

결제를 했던 기간은 두세 달 정도였던 것 같은데 수업이 미뤄지도 하다 보니 네 달 이상 지속됐던 것 같다. 그 기간이 끝나고 우리는 결제 없이 따로 모여 그룹을 이뤘다. 몇 번 스터디룸에서 수업(이라 명하고, 실상은 영어로 잡담)을 진행하다가 장소가 여의치 않아서 우리 집으로 옮겨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물론, 고시원 말고 아파트에서.

 

3. 아파트(feat. 이렇게 넓은데도 한번 살아봐야지 않겠어?)


7개월 동안의 고시원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처음만 할만했다. 공간이 워낙 좁다 보니, 청소할 공간도 적었다.(물론, 나는 청소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도 힘들었다. 햇빛이 들지 않았고, 환기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작고 소중한 창문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런 힘듦은 앞으로 다시는 겪고 싶지 않고 집은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는 조금 (많이) 무리해서 아파트에 입성했다. 해결된 전셋집의 모든 짐과 고시원에서 쓰던 모든 짐들을 옮겼다.(도움을 주신 가족분들께 그리고 친구에게 너무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화장실도 새로 고쳐서 들어갔다. 집이 조금 넓은 편이었고, 낡았었다. 그래서 가능했던 아파트였던 거 같다. 그럼에도 화장실만큼은 꼭 고치고 싶었나 보다. 굳이 굳이 화장실은 수리를 해달라고 애원을 해가며 수리해서 입주를 했다.

 

방탕하다 (放蕩하다) [형용사] 1. 주색잡기에 빠져 행실이 좋지 못하다. 2. 마음이 들떠 갈피를 잡을 수 없다. 3. 그 당시 나의 삶.

 

처음엔 좋았다. 왜냐하면 고시원은 한 달에 주차 포함 45만 원 정도였는데, 아파트로 이사하면 대출이자가 22만 원에 관리비가 15만 원 정도였기 때문에 고시원 생활할 때와 지출이 비슷하다고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정말 처음엔 좋았다. 얼마나 좋았을까, 방 한 칸도 제대로 안 되는 작고 좁은 곳에 머물다 앞이 탁 트인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 후 집들이도 하고, 영어 스터디 친구들과도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갖었다. 생활, 여가, 친구, 직장 등 모은 게 만족스러웠고, 행복했었다. 얼마 동안은 말이다.

 

4-1. 급여 미지급 및 권고사직(feat. 그-지)


또 다시, 1敗

 

잠깐이었다. 갑갑했던 첫 번째 회사를 떠나 판교에 올라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하며 경험을 쌓고, 새로운 집에 입주하기까지 행복했던 순간은 찰나였다. 4월에 계약 후 5월에 입주를 했는데, 그 사이 회사가 많이 어려워졌는지 월급이 한 달 두 달 밀렸고, 이직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이직을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와버렸다.

 

정말 한 달 후에 결과를 알려준, 2敗 결과

 

그런데 조금 억울한 점은 분명 월급명세서에는 4대 보험 등 각종 공제금이 떼어진 후의 금액을 월급으로 받았는데, 회사에서 내야 하는 고용보험 3개월 치가 밀려있던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내가 내야 하거나 회사를 고소해야 한다고 하더라.(지금은 없어진 회사를 상대로 고소를?)

벌 받는 거 같았다. 뭐가 그리 답답하고, 혼자 그리 잘났다고 친정 회사를 뛰쳐나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벌 받고 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억울할 것도 후회할 일도 없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내가 스스로 택한 나의 커리어이기 때문이다. 2019년 6월 월급날(심지어 이 날 월급 못 받음.) 다음날 오후 4시에 퇴사 통보를 받았고, 당일 퇴사를 시전 당했다.

힘들었다. 당장 한 달 동안 사용한 카드값을 결제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 돈을 빌리고야 말았다.(금방 갚았다. 아버지 늘 감사합니다!) 수중에 6개월치 월급 정도는 현금으로 들고 있어야 한다던데 그것은 진리다.

 

4-2. 백수 그리고 실업급여(feat. 워킹데드)


공부하자,

 

그렇게 나는 백수가 되었고, 이직 준비를 열심히 (안)했다. 코딩 테스트가 웬 말이고 CS 기초지식, 면접 준비가 웬 말인지. 생각해보면 이 때도 준비를 했다면 얼마든 맘 놓고 넋 놓고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왜냐하면, 그간 내가 열심히 쌓아왔던 고용보험금을 월급 혹은 용돈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최소한 돈 걱정은 없을 것 아닌가?

 

이 분, 후에 미나리에 나오는 그 분. 미나리 볼 때 너무 반가웠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영어공부를 미드 보면서. 워킹데드가 시즌10인가 11까지 있는데 이 기간에 전 시즌을 다 본거 같다.(영어 공부하는 척하며, 극한의 상황 속에 놓인 여러 무리의 인간의 삶에 애환에 대해서 공부했다.) 물론, 미드만 본건 아니고 틈틈이 면접도 보고 정말 공부도 하긴 했다.

 

의문의, 1勝?이지만 ASP.NET은 쫌...

 

5. 쌓여가는 의문의, 승리(feat. 조금씩 찾아오는 기회)


쌓이는 승리, 2勝?이지만 쫌...

 

조금씩 합격을 했다. 작은 회사, 큰 회사, 먼 회사, 가까운 회사 등. 찾아서 지원했던 회사뿐만 아니라 헤드헌터를 통해 제안받고 합격한 회사도 여러 군데. 정중히 거절한 곳이 6 곳은 넘는 거 같다. 그런데 참 욕심이 많았다. 용돈이 차곡차곡 들어오기도 했고, 이름 대면 아는 곳으로 이직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물론 앞자리도 바꾸고 싶었다.)

 

6. 마무리


다사다난했다. 친청 회사를 버리고 꿈을 찾아 날아가는 불나방처럼 행동해서 벌 받는 거 같기도 했고. 사람들이 보통 겪지 않는 일들을 많이 겪었던 2019년 상반기였다. 이전과 비교해봤을 때 변하지 않았다. 욕심은 많았고,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 말은 많은지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2019년 상반기를 회고하며 이 친구를 빠뜨릴 수 없다. 내가 판교로 올라오면서 거의 동시에 친구 한 명이 판교에서 가까운 용인 현장에서 근무를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절친으로 지내던 친구인데 참 인연이 깊다. 판교에 올라와서도 가까이에 지낸다는 것이. 그런데 원래 술 먹는 걸 좋아하고 또 잘 먹기도 하던 친구인데, 현장근무를 하다 보니 이게 더 잦아지고 심해졌다.  나도 함께 잦아지고 심해졌다. 나쁘진 않았다. 타지에 올라와 적응도 못하고 있었는데 오랜 친구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조금 많이 의지가 됐던 것도 같다.(고맙다 프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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